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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 自白馬西來 象敎東流 名山勝境鮮 不營梵宇華宮
棋錯星分 烟火相望 鼓鐘相聞 在在稱雄 以配蘭陀
給孤園
竹林精舍像法之興崇 有如此矣 爰及海外 有神僧
順道 來高句麗
訥
祗王時
沙門黑胡子自高句麗至
又胡僧
摩羅難陀自晉來馬韓
於是三
國 競相遵尙 綿綿然未嘗絶 國雖褊小比中州爲甚
盛矣 湖南道秋城
法雲山有玉泉 卽古之
淨源寺 先
覺
國師詵公俶始創 裨補
三千之一也 嗣
後有龜谷大
禪師 嘗杖錫及此 拓大而恢復之 稍有
叢林之制
中間起廢者不一其人 而自唐歷宋元 逮于皇明 上
下幾千載代禩寢遠 雖湮不可考 與時興替者 豈無
數於其間哉 今其破礎裂瓦 土蝕於蓁莽中者 皆其舊址 則知其前
日輪奐
莊嚴之鉅麗也 至於隆萬間
垣墉盡傾 堂宇不葺 庇風雨避燥濕之無地 居僧不
滿屈指 幾乎不可復 又右麓外一牛鳴地 有誅茅縛
椽而居者 所謂上下寺也 時郡豪有金姓者 利其蕪
廢 不振業 已占窀穸於虎肩 蓋知其際荒殘寥落之
甚也 近自兵烽之後 稍復舊觀崇禎丙子
大比丘杜
英 重修
普光殿撒其上棟 有書云 正德十一年春三
月 幹善
道人杜英重新 自崇禎遡正德 年所一百二
十有奇 豈其前後身耶 何年月名字之 異世而同符
若是 此甚
希有也 吾聞
浮圖未成 而公美爲玄度之後身 千尺像畢 而僧護爲
僧祐之前身 此古今所傳
不可誣也 按朴學士仁範 奉製撰了空
禪師碑 列弟
子十餘人 其一居
法雲山
淨源寺 了空卽詵公之諡
然則今玉泉 是
淨源之改扁者明矣 而昉于
先覺 亦不虛矣 先覺之昉旣不虛 則
龜谷之復 必也
無疑 而重新於正德 改構於崇禎 以迄于今 蟬蛻其
陋穢 而一新之翬飛 壯聳於中央者
普光大殿 殿中
有
古佛 厥靈甚赫壬辰島冠陸梁 諸寮盡爲劫灰 唯
殿獨 不燬 賊黨頗褻慢金軀 俄而無繩索盡自擊縛 愕然驚悚 各自伊吾 乞哀經宿 乃自解去 大谷里人
被係虜者 目其事甚 悉獲免而歸 言於衆 至今傳爲
故事 其後信堅 貿紫金 治瑩
三尊像
普光之左 爲冥
王殿 智淨建 而金
居士豊山 化肖像 其下爲
禪堂社
英先
普光而興功 冥王之東 爲瞻星閣元寔募衆緣
而成之 瞻星之東 爲
彌陀殿 信訓因舊貫而補之 其
下爲
庫司 藏諸法具什物 其東步武許 有
藥師殿 海
竺肇開之
普光之右爲上室
自覺緝思益之舊 其下
爲
僧堂 慧雄修覺一之後室之西 爲
觀音殿 慧華結
構而性 譍繼治其業
觀音之北 爲
普明殿 元玉移建 而海敏經始于前
普光之後置一堂 凡五間 左四楹
列 宗默重繪十六譍眞像 右三楹垂近古諸德之影
又橫一室於西隅 名以覈玄 皆建標之所建也
普光之前 架大樓 肇起於天機更新於智珠 樓之東 爲淸
風寮 文惠胥宇 而學戒再治 其東爲明月寮 敏湖栦
輿 而慈遠復理 又其東爲普賢殿
一禪終美 而信默
始繕 其前爲碓坊爲圊廁 樓之西爲淸心堂 雙絢移
西 庵於此也 其西爲
文殊殿
文殊之北 爲香積廚 皆
雙鏡之所建也 樓之前四王門 雪浻塑王像 處謙建
閣而覆之 其外曹溪門雙卞闢之 又用石工 鍊他山 壘
普光階 戺階下有石井一口 甘涼淸洌 可供萬衆
而不易渴意 玉泉之額 必取此也 於是玉泉之廢 鼎
新而閱半百餘祀 厥功告竣 此皆向來幹善群公之
殫其才力者也 雙運佛臺二庵 在寺東壁外 幷
大師學崇之營締 故基者 覺
一禪老 於
大師爲僧祖禰 而
經營斯寺十數年間 或勸同志 或躬執役 以至毫累
銖積 再造
伽藍 大師於此 不無蒿目之憂 辦大同紙
役 代衆勞費 以供官需 使居者安堵 募
檀那 獲水田
若干塍 以足
常住供資 此其大者 其細詎可悉乎 顧
與雪淳雙楫 覺均泰絢妙蓮諸德 咨謀會同 食息不
能忘寺事 終始如一 日异哉 祖孫兩世 其扶顚補敗
之功 豈與彌盧
香海 量其高深哉 可謂中流砥柱屹
立頹波矣 嗚呼 世之縫掖 爭以攘
釋氏爲侈談 必曰
釋之 徒游手游食 耗蠹民財
招提梵刹 宏敞美麗 勞
民力於土木 奪資産於金帛 財用易竭 風俗易澆 宜
乎掃除不得滋 請試言之 吾佛之道 以
淸淨無爲爲
宗
慈悲不殺爲敎 雖若不切於世治 苟能推是心 使
一世人 皆知善善惡惡 以躋仁壽之域 則豈少補哉
今夫
衆生 苦海沈浮 莫知津涘 而以佛爲
彼岸 則圓

方服者 皆奉佛之徒 殿宇堂寮之壯 像設金碧之
嚴 其可已乎 譬如醫師治病 必譍病與藥 其於病寒
者 投以丹砂烏喙 病喘者 授以白朮紫團 旣無病則
毋用藥餌 寒疾未瘳 喘疾未去 而欲先除其丹砂白
朮者 吾未知其可也 前代之尊尙興崇者 豈無以也
深蚖其攘斥者之言甚無謂也 余自武靈佛岬來 駐
錫五箇月矣 蜂房蟻穴 香燈陸續 誦聲駸駸 與鼓錚
雜還 交響洋洋 是
佛國之風 抑闔院緇褐
心地淳庬
威儀楚楚 司一變而至於道 視諸刹爲獨勝可尙也
已諸公不以余爲不才 猶以誌
事相責 無所籍口而
辭 强自搦管 聊以補
一時之闕如耳 他日倘有把如
椽之筆者 則此誌退而覆瓿可矣
호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
(호남지역 담양 땅 법운 산 옥천사 지난 일의 발자취)
서쪽에 있는 나라 인도에서 불교가( 상법시대(1.600여 년전)에 동 북쪽에
있는 나라) 조선에 번져 나와 , 경치가 좋고 아주
고운 명산승지에 사찰 당우를 세워 , 헤아릴 수 없는 화장세계의 집들을
이렇게 저렇게 버물러 지어진 모습이, 바둑알처럼 희뜩 희뜩하여,
분별할 수 없이 외워이(장엄하게) 지어지고, 불타는 연기는 서로 바라보고, 범종과 쇠북소리가 서로 인도하여, 여러 곳 에 웅장함이 배치됨을, 일컬어
마치 인도에 외로운 동산(기수급 고독원)에 있는 죽림정사처럼,
상법시대에 불법을 일의켜 숭상함이, 이와같아 느리게나마 해외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구려에 순도를 보내니 때는 즉 소수림왕 2년 이었고, 눌지왕때 묵호자
라는 사문이 고구려에 이르니 그때가 신라19대왕 제세시라.
또 인도승 마라난타 스님이 진나라를 거쳐 마한으로 오시니 진나라 태원9년 갑신년 침류왕때이니라.
이와같은 때에 삼국이 서로 다투어 불법을 쫒아 숭상하는 정성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나라는 비록 작고 좁지만 땅기운의 중심이 되는 곳을
골라 깊은 정성을 담아 호남땅 법운산(관음지) 옥천에, 옥같이 맑은 샘물이
있는 옛 정원사를 선각국사(도선국사) 께서 시초 처음 창건을 돕고 도와
모자람을 채우고, 그 뒤를 이은 구곡 대선사가 일찍이 도를 상징하는 주장자를 드리시고 주석하시어 크게 개척하시어 넓히고 복원하시니 점차적으로
총림의 규모로 지어졌다.
중간에 집이 쏠리는 것을 일의키기를 한 두사람이 아니었고, 몸소 송나라
원나라(당나라 연대)때에 총명하신 임금의 부름을 받아, 위 아래로 몇 백대를 두고 이어서 옷 매무새를 갖추듯이, 잠을 멀리하고 비록 연기같은 허망한
세월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시간은 너울너울 지나가고, 흥했다 바꿧다 한지 수없는 기간이 되어, 이제는 그 기초가 깨뜨려지고, 기와가 갈라지고, 흙에 잠식되어 풀 속에 묻혀져 알고 보니 다 그 옛 절터이더라.
그 전 옛날에는 법륜을 굴려 크게 장엄하고 화려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융성했던 만칸의 집과 성같은 큰 담과 작은 담벽들이 엎드려 무너지고,
마루와 처마가 기우러져 덮지 못하고 비 바람을 피하지 못해 풀만있는 땅이
되어, 살고 있는 스님이 만족치 못하지만, 손가락이 닳토록 흙을 파서 몇 번이나 복원해 보려고 몸부림치며, 오른쪽 산기슭에 별이 비추고 소가 우는
땅에 띠 풀을 베어 얽어매어서 서까래로 삼고 사는 자가 있어 소위 위 아래 절이라 하더라.
그때, 담양에 부호인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쓰러진 황무지에 몸소 이익을
생각치 않고, 무던한 업도 아니하고, 몸소 범과 동무하며 점점 묻힌 것을
파고, 덮은 이영의 끝이 거칠고 쇠잔한, 요사채의 퇴락이 심해진 것 과, 왜병들이 봉화 한 것을 점점 복구해 가는중, 승정 병자년때 큰 비구 두영스님이 보광전을 헐고 중수하려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서 정덕11년 춘3월 간선도인과 두영스님이 거듭 신축하고, 그로부터 숭정 삭 정덕년(서기1506~1521년)이 된바, 120가지 기이함이 있었다고 하나, 어찌 전후의 일을 몸소 알겠느냐.
년 월과 이름을 알 길이 없고, 다른 역대에도 증거가, 만약 다르지 않고
이와같다면, 이는 심히 대단히 희유하고 드문 일이라.
내가 들은 바 부도탑도 미완성으로 다 마치지못해, 도선국사의 좋은것도,
아득하게 지나버려 훗날 천년이 가까이흘러 상법시대가 다하여, 스님의 벼슬하신 전신의 부도를 하는데, 도우라는 옛날의 교지를 통해 이렇게 고금에
전해온 바를 속인다는 것은 옳지 않음이라.
신라의 효공왕이 학사 박인범으로 하여금 성인의 상서로움을 살펴서 높이
봉양해 비문의 글을 짖게하고, 비석을 만들어 나열된 제자 10여인이 이
법운산 정원사에 함께 살았는데, 신라의 효공왕이 묘공선사(도선국사)의
행장의 시호를 내려주시고, 지혜의 등불이라 증명하시여 묘공스님의 탑명을 지어, 글로써 일러 주시었다. 또한 고려의 인종 임금께서 선각국사(도선국사)님의 공적을 추서해 크게 왕명으로 책봉하여 명하시고 최유정으로 하여금
비문의 글을 짖게 하였다.
그러한즉, 이제 정원사 현판을 옥천사로 고치어 선각국사(도선국사)를 헛되지 않게 하여야 옳음이라.
선각국사(도선국사)를 비롯해서 이미 허망치 않다하신 즉, 구곡 대선사가
다시 복원했다는 것도 반드시 의심이 없고, 새로 중창한 것도 정덕시대를
거쳐, 거듭 세우기를 승정때 이를 마치니, 우금 매미가 허물을 벗고 꿈실거리는 모양이라 좁고 고루하고 거칠은것은 일신이되어, 아름답고 훌륭하여
장엄하게 솟아있는 중앙에는 보광대전이 있고, 보광대전에는 오래된 고불
부처님이 계시어, 영험이 몹시 성하게 높아 절하는 사람이 줄을서고 하는데, 임진 도관 융양때 모든 요사의 재산을 약탈하고 불에타서 재만 남았 는데,
오직 법당 독채만 불타지 않았다.
사복의 옷을 입은, 오만 방자한 허우대를 가진 도적의 무리들이 ,기우러져
가진 것 없고, 지친 우리들을 쫒아와 두들겨 패고 결박하니, 깜짝 놀라
두려워서 스스로 흩어져 각자 몸소 구걸하고 경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고,
대곡리 마을 사람에게 이끌리어 종처럼 일하며 덕을 입었다.
눈여겨 보면 그 일이 너무 힘들어 종(宗)이고 뭣이고 벗어 버리고 싶었다.
여러사람의 말을 듣자면 지금 전해오는 옛 일은 그 후 신견이라는 불자가
자금을 모아서 시주하여 밝고 깨끗하게 다듬어 삼존상을 모시고, 보광전 왼쪽에 명부시왕전을 건립하야, 지혜가 맑고 깨끗한 사람인 풍산후인 김거사의
초상화를 그려 본받게하였고, 그 아래터는 선당 선방짖고, 사직으로 먼저
보광전을 지은 공이 있고, 명부시왕전이 동쪽에 방편으로 도우는 칠불각
참모연을 여러 인연으로 이루고, 칠성각 동쪽에 미타전은 신앙의 오랫동안
가르침을 마치는 도움이 되고, 그 아래 창고는 모든 법구와 일상생활에 쓰는 도구도 갈무리하는 곳 이고, 동쪽으로 몇 걸음되는 가까운곳에 약사전이
있어 해초 천축(신라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함) 의 인연을 비로서 열고,
보광전 오른쪽 높은집은 몸소 깨달으기 위해 질삼도하고 모아서 더 나아가
옛을 생각하며, 그 아래는 승당이 있어 큰 지혜의 깨달음을 딱는 집이있고, 서쪽 뒤편에 관음전이 지어져 지혜가 빛나 어려운 짜임새의 바탕을 이어서
그일을 다스리고, 관음전 북쪽에 보명전이 지어있어 옥천에 으뜸가는 집을
옮겨 세우고, 앞에 했던 혜민경 강설을 다시 시작하고, 보광전뒤에 오칸채
한 채를 두고, 좌측에 네게의 기둥을 배열하여 짖고 높이 받들기 위해
열 여섯분의 영정의 진상을 모시고, 오른쪽 3개쪽에 옛 모든 대덕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또 가로로 1실이 서쪽 모퉁이에 있고, 이름하여 실상을
아득 하나마 조사하니, 다 건표년 때에 건립된바이다.
보광전 앞에에는 큰 누각을 세워 비로서 천지의 기밀을 아는 일을 일의키고, 다시 새롭게 주옥같은 지혜의 집인 동쪽바람을 맑게하는 요사체를 짖고,
문자의 은혜를 주고 받고 학습한 계행을 가리는 집인 요사가 그 동쪽에
밝은 달이 맑게 비치는 곳에 지어있고, 호수에 물을 빠르게하는 바탕 부처님의 은혜가 멀어져 바름을 다시 돌리는 보현전을 동쪽에 지어, 오로지 고요한 선정의 유종의 미를 다하여 침잠된 신심으로, 처음처럼 마음을 잘 기웠다,
그앞에 디딜 방아가 있고, 해우소가 있으며, 서쪽에 청심당이라는 집이
있으며 쌍쌍히 단청 채색 무니가 서쪽으로 이동하니 이는 암자니라.
그 서쪽에 문수전이 있고, 문수전 북쪽에 향적당이 되고, 이는 다 짝을
살펴서 지은 바이다.
앞쪽에 사천왕문의 집이 있으며, 눈녹은 물이 소용돌이치는 옆에 흙으로
천왕이 계신 겸손한집을 다시 짛고, 그 밖에 조계문 쌍문을 열고보면, 또 석공을 부려서, 돌산을 연마하여 첩첩이 보광계단이 있고, 섬돌계단아래 돌샘이 정성스러운 입구자 모양이 있고, 그맛은 감로와같이 달고 맑고 청량하며
써늘하야, 상쾌함이 가히 만중생에게 베풀면, 갈증의 목마름과 병이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때문에 구슬 옥 샘 천이라는 현판을 반듯이 받들어야한다.
어언 세월이 흘러 이렇게 옥천의 집이 쓰러지매 새로이 반백년이 넘토록 공 드리지 못하고 고하지 못하였는데,새로이 솥을 걸어 다시 회향의 운이 돌아와 한줄기 착한 많은 무리의 군중이, 각자로 지혜와 힘을 다하고,쌍쌍이 움직여 두암자를 짖고, 부처님을 이운하고 절의 동쪽 벽밖에 옛 대사님들의 높은
학문과 지으신 일에 매듭을 지어, 옛터에 크게 깨달으신 노선사와 대사님
스승님들과 조사님으로 사당을 짖는등, 이 사찰을 운영한지 십 수년간에
혹 전선 화주한 동지와 혹 몸소 직접 노역의 역사를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터럭이 쌓이고, 저울눈금 찾아가듯, 세 번의 가람을 지으니, 대사님의
눈에 티가 들어간 것 같이 근심이 없지 않았겠는가.
함께 대동하여 힘들게 벽지를 바르고 대중의 노력한 병용과 관가의 음식을
공급하며 심부름도하고 부리는 자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해야하고, 단월 신도 포교도 해야하고,논 밭에서 약간의 곡수도 걷어야되며, 상주하는 대중의 공양을 흡족하게 도우는데, 큰 시주자와 그 세밀함을 모를리 있겠으며
다 아는 바 라.
더불어 서로 노를 젖는 것 같이 눈같이 순박하게 돌보아주는 각균스님, 태순 묘련스님등 모든 대덕이 하나로 모아 자문하고 도모하며 밥먹고도 쉬지않고, 착하게 절일을 잊지않고 시종이 여일하게 날마다 탄식하며, 조상과 후손등이 대대로 엎드려질것을 붙들고, 무너질것을 도우는 공의 향기가 넓고 깊음을 측량 할수 있겠는가,이를 일러 중심을 잃치않고 움직여 절조를 지키며 우뚝솟은 정신으로 무너지지 않게하니, 자빠질것을 움직이게한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도다.
겉으로 꽤맨 옷을 입고 부처님의 말씀을 훔쳐다 크게 떠벌리는 무리들이
노닐며, 백성의 재물을 좀벌레처럼 소모하니, 절의 재물이 거덜이나 크게
드러나서, 아름다운 백성들이 나무나 흙 돌 등을 쳐 일을 한 노력으로 모은 돈과 비단 등 의 자산을 잃어버려진것처럼, 재물을 쉽게 다 저버려, 생활습관이 엷어 쉽게 쓸어서 버리니, 말을 물어 더듬어 하자면 우리 부처님의 도는 청정함을 함이없이 받들으며, 자비로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한 사람을 부려 세상사람 다 착한일을 많이 하고, 악한일을 부끄러움으로
알게하고, 비록 느스러지고 순하며 간절하게 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다스려지고, 이로써 어질고 오래사는 범위에 오르게하는데, 지금 대개의 중생이 무지하여 물가인지 나루인지를 깨달으지 아니하고, 알지 못한다.
부처님 계신 저 언덕에 가기위해 원각의 법을 두루 행한 자, 불법을 받들어 행한 자 다 신도의 무리라.
불당의 집과 요사의 집을 장엄하고,불상에 금박을 입히고 엄숙
하게 함이 가히 옳은 일이라.
비유하자면 의사가 병을 다스리게 되 반듯이 병을 따라 약을 쓰는데,그 병이 냉으로 온 병인가.. 열로써 온 병인가..판단하여 투약하되 경명주사를
입혀만든 단사를 까마귀가 쪼아먹듯 조금씩 투약하고, 해수병자에게는 백출자단환을 주고 치료하되 없는 즉 보약이나 먹이고 찬병이 덜낳고 해수병도
버리지 못한 자 먼저 단사 백출로 제거하나 먼저 욕심을 내어 알지 못함이라
과거에 대대로 높이고 흥왕하게 숭상한 자 어찌 없었겠는가.
깊은 도룡룡의 독을 물리친 자 다 말로 다 이를 수 있겠는가,
너나 내가 엄숙하여 영험있는 부처님 산 모퉁이에 와서 머무른지 5개월이
되어, 벌집 개미 구덩이 향과 등촉을 뭍으로 이어져
오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 말달리듯, 머무름없이 북소리와 더불어 쇠소리 부치는 소리가 섞여서 돌아가고, 돌아오며 얽혀서 들리는 넓고 양양하니, 이게
불국토에 바람이라.
검푸른 물색 옷 승복입은 수행자의 집 전체를 억압하고, 핍박하여도,
마음자리는 순박하며 방과 위의는 높고 산듯한데 한생각 고쳐 지극한 도에
이르러 모든 절을 보니 홀로 이겨나가는 것이 가상하고, 모든 것 공정하고
자기것으로 하지 않으면서, 재주도 없지만 같이 발자취 사기를 기록한 일을 서로 맡아서 문서로 기록하고 ,구전으로써 주관을 가지고 스스로 힘써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귀로 들은 것은 언젠가 없어져 버리니 다음날 문득 잡아
둔것 같이 기록하며 붓을 끝맻으며 사기 기록을 물러나며 다시 살핍니다.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