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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한국종교 그 전통의 특징)- 최종석 교수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5-04-08 (수) 15:36 조회 : 1807

1. 巫俗(巫敎; Shamanism)의 영향이 강하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는 무속의 영향을 받는다. 북방(시베리아)의 샤먼과는 차이가 있다. 즉, 脫魂인(Exstasy; 영혼의 빠져나감)데 반하여 한국의 경우는 接神(憑依; Enstasy)이다. 이에 비하여 禪에서의 명상은 Kenostasy로 비운다는 뜻이다.

2. 특정종교가 특정시대를 지배한다;

1) 원시종교시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선사에서 4세기 이전. 원시종교가 지배하던 시대

2) 불교; 4세기에서 14C까지(조선 건국 이전). 1천년을 정신과 생활, 지적, 미적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란 다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3) 유교; 14-19세기. 조선왕조 건국 후부터 몰락할 때까지의 시기. 그러나 유교는 불교와 비슷하게 들어왔으나, 이 시기에 조선을 지배한 유학은 秦나라 이전의 先秦儒學이 아니라 고려 말에 安珦이 중국에서 가져와 전파한 송의 주자학이다.

4) 유교 이후시대; post Confucianism유교 이후 새로운 종교적 영향력이 행사되는 시기이다. 현재 주도적인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가 급성장 중이다.

※ 세계의 종교(world religions); 고등종교: 진화론적 입장에서 나온 용어이다. 보편적 진리를 전파하는 종교.

* 18C 후반 서양 선교사들의 기행문에는 한국에서 불교가 없어질 것이라고 언급. 성종 때의 경국대전에는 불교라는 단어가 삭제, 연산 때에는 승려들을 기방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승려의 신분은 급락하였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빠르게 불교는 부흥하였다. 그러므로 불교신도는 현재 늘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3.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보수성;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를 받아들일 때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번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끝까지 간직하는 성향이 있다. 즉, 어느 정도의 영향은 받지만 다른 종교의 파생을 야기할 만큼의 심도 있는 혼합주의는 기피한 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도교는 무속과 혼합하여 현재의 도교, 일본의 신도는 불교와 일본 민속신앙의 혼합. 티벳은 불교 + 민속신앙(Bon)에서 라마교. 그러나 한국에는 이러한 예가 없다. 한국의 선종은 신라 말에 들어와(중국의 도신에서 법망으로 이어짐) 본래 모습을 현재까지 지키고 있다. 羅末麗初의 선종이 전래한 후 지금까지 원시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로 남아있는 모습에서 보수성을 찾을 수 있다. 주자학도 그렇다. 다른 유학의 유파와 양명학도 들어오지 못하였다. 개신교에서도 동일하다. 150년 전에 들어올 당시 금기 시 되었던 흡연, 음주의 문제는 아직도 지켜지고 있어 보수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 한국종교의 특성인 다양한 종교분할로 종교간의 대화에 기여;

종교적 분쟁이 없다. 종교의 실제적 연습장은 한국이 유일하다.

5. 한국의 종교는 역동적이다;

산업화는 종교가 衰落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기독교, 불교 모두가 종교적 행사에 역동적 참여를 하고 있다.

6. 역사적 문제의 해명 가능성;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서구의 두 전통이 함께 수용되는 과정. 유교의 경우도 중국에서는 전국적인 전파를 할 수 없으나, 우리의 경우 주자학이 전체를 실험의 장으로 할 수 있었다. 선종과 교종도 함께 불교로서 공생을 한 것이지 어느 하나가 침체되지는 않았다.

7. 한국은 산업화하면서도 종교는 더욱 발전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산업화는 종교를 타락시키던가, 노동으로 인한 레저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교회가 더욱 번창한다.

▶ 기독교

※ 나자렛 사람 Christ는 30세 이전까지는 무명이었다. 30세에 이르러 갈릴리에서 전교를 시작, 갈릴리의 어부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들 제자들은 대개 예수보다 나이가 많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이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유태는 로마의 지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통 유일신의 유태교를 믿는 사람, 로마의 다신을 믿는 사람으로 섞여 있었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사랑의 황금율법”으로 傳敎하였다. 그러나 유태인의 일부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로서 새로운 왕의 탄생을 기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예수는 “유태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죽음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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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位格으로 구성되어 진다는 敎義이다.

칼게돈 공의회: 451년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요청으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아시아의 칼게돈에서 소집한 제4회 세계교회회의. 이때 이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단성론, 네스토리안 파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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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론: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의를 부정하고 神性과 人性이 완전히 결합 또는 융합하여 단일의 性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페르시아, 이집트(곱트), 이디오피아 지역에서의 신앙인이다. 이들은 11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라틴교회를 폐쇄, 동방정교가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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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 서방(라틴; 로만 카톨릭) 교회의 상대적인 의미로 일반적으로 보편적 신앙의 교회를 의미하며 1053년 분리되었다. 세계 공의회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며, 모든 신앙의 문제를 공의회에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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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년은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마르틴 루터는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면죄부에 반대.

면죄부: 카톨릭 교회가 신자들에게 죄를 赦하는 대상으로부터 기부를 받고 교황의 이름으로 발행한 증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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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1483-1546): 원래 수도사로서 수도부의 부원장을 하였던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로마교회의 권력남용에 반대하고 교회의 민주적 구성에 앞장섰으며, 일부 지식인층만 볼 수 있었던 성경을 독일어(지방, 민족언어)로 번역해서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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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16세기 마르틴 루터, J. 캘빈 등의 종교개혁 결과로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한 기독교의 분파이다. 성서를 공유하므로 복음신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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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Jaen Calvin 1509-1564): 스위스 사람이지만 프랑스의 신학자가 되어 종교개혁에 기치를 들고, 루터에 비해 활동적 성향이 강했으며,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神觀을 부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리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신예정설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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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성공회; 헨리 8세(1533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그의 딸 에리자베스 1세도 1570년 파문)가 로마교황과 결별 후 영국의 국교(1571)가 되었다. 성공회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인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과 공” 두 자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많은 분파가 나왔는데, 감리교(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 형제에 의해 시작된 교파(1783)로 교리의 특징은 실제적인 상황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데 중점을 둔다), 침례교(프로테스탄트에서 가장 큰 가지를 구성하고 19세기에 생겼다.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큰 특징이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에 1300만의 신도가 있다. 세례가 물에 넣는 데서 그 이름이 나왔다), 퀘이커(무교회 주의자, 함석헌;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로 1647년 영국인 G 폭스가 창시하였고, 이들은 인디언과의 우호, 흑인노예제도 반대, 전쟁반대, 양심적 징병거부, 십일조 등을 반대한다), 이 외에 모르몬(조셉 스미스, 자식이 7-80명; 일부다처 poly gami), 여호와의 증인(혈액을 중요시 여긴다. 영혼은 바로 피다), 제7일안식교는 지복천년설(예수가 천년을 지상에서 통치하고 난 후 종말이 온다)을 믿는다. 이들 모든 교파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에큐메니칼 운동(통합적 신학운동)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재 신도가 증가하지 않고 있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 불교와 기독교

他 종교를 바라보는 立場

1. 배타주의: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 절대적인 입장. 다른 종교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 유일신을 믿는 신앙이 대개는 그러하다. 이러한 배타주의적 종교의 긍정적인 면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열정이 강한 만큼 정체성도 강하다. 이것은 선교주의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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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괄주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관용을 가지고 있는 것. 자신들의 신앙은 고수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나 진리가 부분적으로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종교의 진리가 언제인가는 나중에 우리에게 회유될 것이다라고 하는 주장. Karl Rahner: 독일의 신학자. 바티칸공의회 때 가장 영향력이 큰 고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타 종교, 사상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불교인이나, 다른 여타의 종교인을 가장 낮은 상태의 기독교인으로 보아 匿名의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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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대주의:

다른 종교에 대한 진리를 완전히 인정하기 때문에 평행주의라고도 한다. 포괄주의보다 더 개방적인 주의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신앙에 참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종교도 완전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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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충주의:

기성종교보다는 새로운 신흥종교들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증산도는 여러 종교에서 장점을 취합하여 절충한 것이다. 後天세계에는 조화종교가 나타나 공자, 석가, 노자, 예수, 복희씨까지 모두 동원되는 구절판 같은 것이다. 공자의 제자로 주자, 석가의 제자로는 신라의 진묵대사, 도교에서는 최수운, 최제우, 기독교에서는 마테오리치, 역에 대하여는 김일부(정역의 저자)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절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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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혼합주의:

문화권들 사이에서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되는 종교이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불교와 기독교를 혼합하여 새로운 교리체계가 만들어진 종교이다. 비빔밥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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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원주의:

포괄주의와 배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John Hich; 당시의 기독교를 천동설과 같은 종교로 규정. 천동설은 지구가 중심이고, 신 중심주의이다. 그러므로 지동설에 입각한 다원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The Onenes(一者) 모든 종교는 자신의 진리를 나름대로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 지구도 다른 항성과 함께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 지구적 신학(global theology)을 제창하였다. Raimund Panikkar: 카톨릭 사제로서, 아버지는 힌두교(인도인), 어머니는 카톨릭(스페인)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제가 된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어머니는 자신을 사제로 키웠으니 천당, 아버지는 이교도이므로 지옥, 자신의 기도로 아버지도 천당을 간다면 천당에는 모두 천주교인들뿐이므로 그의 아버지는 그곳을 천국으로 느낄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 그래서 아버지의 고향인 인도로 가서,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등 고전주의를 섭렵한 후 여러 가지의 종교를 빛을 분광시키는 Prism으로 설명, 종교란 동일한 근원에서 굴절의 왜곡현상(지역, 문화, 민족 등)이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불교와 기독교(2)

종교체험을 통한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

불교에서 지향하는 인간은 성불, 깨달음에 이른 인간이며, 기독교는 절대신(타력)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점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4장 48절: “하늘에 계신 너의 성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다.”는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完德의 길을 가는 것이다.

完德의 길

1. 초심자의 정화의 길: “어린아이처럼”되는 것. 어린이는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한다. 굳은 음식을 못 먹는 것처럼 젖을 먹어야 한다.

2. 진보자의 빛의 길: 어린이보다 성숙한 단계로서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빌립보서 3장15절)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 達道자의 길: 영적인 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이상에서처럼 철저하게 타력적인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八正道: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를 없애고 해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 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초기불교에서 4성제의 마지막 도에 해당한다. 깨달은 자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에게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위의 기독교의 깨달음을 얻는 3가지의 길은 성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에서 신앙체험에 의한 이상의 과정을 살펴보자.

1. 正見: 바른 견해; 부처가 깨달은 바를 내가 받아들이는 신앙의 결단이다.

2. 正思: 바른 생각

3. 正語: 바른 말

4. 正業: 바른 행위

5. 正命: 바른 생활

6. 正精進: 의식주를 통한 바른 생활

7. 正念: 바른: 바른 기억

8. 正定: 바른 집중, 바른 삼매

苦集滅道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苦成諦이다. 三法印에서의 一切皆苦의 苦와 사성제의 苦는 범위에서 다르다. 一切皆苦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사성제의 고는 인간에 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성제의 고는 인간에게 해당된 苦이다.

    욕망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열반이다. 욕망의 극소화의 길은 바로 팔정도인 것이다.

    ※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출발이 계시이고, 불교의 출발은 깨달음이 그 출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우침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불교이어야 한다.

    ※ 正見: 진리를 향해 마주 봄. 무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결단. 윤리적 규범의 기반은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향한 인식에 있다. 그 출발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데에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고통을 받고 괴로움의 지배를 받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苦의 극복을 위한 지리를 향해 눈을 뜨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결단은 올바른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원리를 찾아낸 부처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 진리의 시선에 고정시키는 것이 正見이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kenosis)은 肉化되어 인간 예수로 나타나고, 예수는 따라서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이 된다. 예수의 생애는 끊임없이 자기 비움의 상태였고, 이 비움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일치를 이루게 한다. 여기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면서 스스로가 그리스도임을 선언하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테오 16.24)라는 신앙에의 결단을 요구한다.

    부처의 깨달음을 받아들인다는 결단이 정견이라는 의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아집과 잘못된 견해를 과감하게 부정하고 부처의 진리를 따르면, 궁극적으로 나도 부처처럼 진리에 일치할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正思: 바른 생각. ‘진리(부처의 가르침과 말씀)를 항상 그리워 함’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쏠림’ 工夫는 스승(夫)을 닮도록 다듬어(工) 나아가는 길을 말한다. 신앙이라는 것도 바로 스승을 열정적으로 닮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팔정도란 깨달은 부처의 모든 것을 모델로 하여 자신을 다듬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팔정도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므로 正思라고 하는 바른, 또는 올바른 생각은 부처의 생각에 나를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正思(samyak-samkalpa): sam=함께, kalpa=맞추다. 즉, 나의 생각을 맞춤. 즉, 적극적으로 깨달은 자처럼 생각하여야 한다. 부처의 깨달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했으면 그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것을 바로 正思유라고 볼 수 있다. 마치 한 남자가 한 여인을 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마음이 진리를 향해 쏠리는 것,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생각이다. 따라서 이 정사, 정사유는 진리에 대한 그리움으로서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도덕성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sam-kalpa라는 말을 살펴보면, sam은 “함께”의 뜻을 지녔고, Kalpa는 “맞추다”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정사유는 부처의 진리에 “나의 생각을 맞춤”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즉 진리에 나의 생각을 쏠리게 하여 고정시키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됨을 말한다. 이것을 올바른 생각이라고 한다.

    ※ 예수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향한 태도로 “내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 22. 37)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도 정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正語(samyak-vac; 바른 언어): 진리 안에서 말의 참뜻을 살핌. 하이데거는 “말이란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였다. 즉, 말이 우리를 기르고 담는 그릇이라고 주장한다. 부처의 진리에 맞추어서 말의 참뜻을 깊이 자각하여야 하고, 다시 진리를 깨닫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써 말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진리를 향한 쏠림과 그리움의 표현으로서 하는 말은 올바른 말이 아닐 수 없다. 구조자의 기도나 선교는 명백한 진리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자신이 신앙으로부터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正言이다. 나뿐 말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단순히 말을 줄이면 된다.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라는 구절에서 말씀은 로고스를 의미한다. 로고스는 불교의 法(Dharma)로 이해될 수 있다. 부처의 깨달음은 법, 즉, 空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법이 하느님 그리고 말씀과 일치할 수 있는 부처의 敎說을 찾을 수 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면 법을 본다. 그것은 법을 보는 것에 의해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나를 보는 것에 의해 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나를 보는 자는 하느님을 보는 자이며, 나를 보는 것은 곧 로고스를 보는 것이다.”라고 하여 두 종교간의 正言에 대한 말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처는 법을 발견하고 실현시켰다. 부처와 동일시되는 것은 부처의 자아가 완전히 空의 상태가 된 것을 말하며, 여기서 일체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眞如이다. 결국 正言이란 나도 부처처럼 말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다.

正業(samyak-karma-anta):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의 행위. 정언의 正語가 완전하게 행위로 드러나고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진리를 품고 이루어지는 행위야말로 바른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는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업으로 남지 않게 된다. 즉, 바른 언어(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가 완벽하게 행위로서 연소되는 것을 말한다.

    ※ 신약에서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닥쳐올지 모른다.”(누가 22.34)라고 하여 항상 신(진리)을 향하여 마음을 올바로 한 상태에서 행위를 하라고 한다.

正命(samyak-ajiva): 바른 생활, 바른 직업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생활. 삶이란 중생들이 연기를 깨달아 가면서 살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와 대비시킬 수 있겠으나, 기독교의 사랑은 이웃이 곧 너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의 信行이나 사랑의 실천은 천국의 보화를 쌓는 것과 같아 사후에 그것으로 상급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자비는 自他불이에 기반을 둔 실천이기에 기독교의 사랑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연기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자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의존(自他不二)에 의한 삶이기 때문이다. 한편 불교는 一微塵中含有十方 아주 적은 존재도 주변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의존(연기)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므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모든 존재(생명이 있든 없든)와 함께 살아지는 지혜로운 無分別의 智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正命을 강조하는 것이다.

正精進(samyak-vyayamo): 바른 노력, 자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생활은 자신의 해탈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참다운 봉사와 깊은 관심 그리고 그에 맞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정진은 그렇게 올바르게 방향을 잡고 노력함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5가지 연결고리가 옳고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당위적인 것이며,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바로 정명에서 보았듯이 이웃을 향한 자비의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노력이란 바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고, 그 노력은 자비의 실천을 의미한다. 즉, 지혜의 실천(반야의 실천)이 자비인 것이다. 자비는 용서와 관용이라는 것과는 다른 지혜의 다른 한 면인 것이다.

    ※ 성경에는 탈란트(돈의 단위로서 집안의 3명의 노예에게 돈을 맡긴 후 나중에 그 돈의 변화된 량으로 주인의 충성을 증명하는 교훈)에 관한 의 비유가 있다. 그 비유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을 잘 발휘하고 게으르지 말기를 경고하고 있다. 종교적 열정으로 예수에 귀의하려면 그냥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실현하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정정진의 의미일 것이다.

正念: 바른 기억, 진리를 향한 열정의 현재성. 종교적 실천에 의한 나의 변화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here and now). 삶은 현재에서만 살아지는 것이지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이다. 즉, 지금 실천되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 늘 깨어 기도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와 함께 신앙의 현재적 실천을 강조한다. 종교적 진리가 갖는 현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正定(samyak-samadhi): 바른 집중, 바른 삼매. 종교적 체험의 면에서는 진리의 체현이다. 바른 삼매라는 의미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이고, 열반이다. 열반은 살아있는 동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체현을 통한 무한한 자유이고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

이와 같은 비교는 교리적 해석으로는 의미가 없을 것이지만, 종교적인 체험을 통한 비교로서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Winston King의 기독교와 불교의 대립적 비교

1.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

기독교: 인격신(personal God); 유태인의 가부장적 신, 萬有를 창조하고 개개인의 삶에 간섭하는 신이다. 태고에서 출발한다.

불교: 비인격적 과정(impers7onal process): 인과율에 따르는 法(Dharma). 1) 인과율, 2) 인연화합, 3) 상의상관성, 4) 법주법계성. 출발은 현재가 강조된다.

2. 세계사의 의미

기독교: 신에 섭리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진행되어져 간다. 증명이 불가능하다.

불교: 生住異滅: 만물은 생긴 뒤 머물고, 움직이며, 멸망함을 반복한다.

불교의 시작은 현재의 '나'이므로 眼(色), 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즉, 인식의 주체와 대상 즉, 六根 + 六境 = 12處(12入)로서 이것은 세계(一切)이다. 그럼으로 현재의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A. Schopenhauer: Hegel과 동시대, 같은 학교의 교수였다.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위에서의 불교의 일체와 같은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그의 세계관은 신의 섭리에 의한 창조를 부정하고 오직 나의 의지와 표상으로서 인식되는 세계를 말하였다. 1, 2차대전이 종전된 후 대두한 실존철학에서 싸르르는 “세계의 운명은 인간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인과율을 인정하고 있다.

세계(12處)의 속성은 바로 三法印(諸行無常 一切皆苦 諸法無我) 즉, 3개의 모습에 대한 객관적 주관적 인식인 것이다.

諸行無常: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諸行은 바로 12處, 세계인 것이다. 인식의 주체인 六根과 대상인 六境이 다 함께 머무르지 않고, 항상 변하고 있다. 여기에 변해 가는 과정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一切皆苦: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시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 苦는 일체의 생존을 위한 “힘들이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諸法無我: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한 것을 찾는 것이다. atman이 아닌, 모든 존재가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연기에 의하여 합성되어진 여러 개의 나인 것이다. “딸기잼에는 딸기가 없다.“

3. 인간성에 대한 의미

기독교: 인간의 본질로서 개성을 존중하고, 유일한, 그리고 일회성인 존재로 인식

불교: 변치 않는 atman이 아닌, 개성이 아니라 五蘊이다. 色(地水火風), 受(emotion), 想(intelligence), 行(behavior, 의지), 識(spirit, 영성) 즉, 고정된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五蘊의 작용이 서로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인 것이다.

4.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 창조신이 인간에 개입하여 인간을 구원

    불교: 자신에 의한 구원. 탐, 진, 치의 무명을 타파에 의하여 자신을 자신이 구원.

▶ 수행방법 상에서의 구분

    기독교: 어떤 대상(신)에 대하여 찬송, 기도, 참회, 감사의 행위로 구원받는다.

    불교: 자력에 의하여 무명을 끊는 방법(명상: meditation)으로 열반(Nirvana: 죽은 후 영성개념이 아닌, 삶에 있어서 탐, 진, 치를 소멸해(zero의 상태) 나가면서 사는 순간이 열반)을 얻는다.

▶ 윤리적인 면에서의 구분

    기독교: 구체적, 활동적이며, 사랑을 강조(피조물이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므로 사랑이란 구원에 전제조건이 된다.)

    불교: 무집착의 윤리.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남. 자비란 나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이 관계가 空한 연기에 의한 것을 아는 것이 지혜(반야)이며, 이 지혜가 실천되는 것이 자비이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滅故彼滅 此無故彼無(잡아함경) 이므로 이것은 自他不二 物我同根 同體大悲이다. 이것은 상의상관의 관계이다.

▶ 적극성과 소극성의 면에서 구분

    - 기독교: 적극적이다.

    불교: 부정적이다. 불경에 不, 無字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包越: 유와 무의 현실을 떠나서 함께 포함하여 초월되어 중도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영혼에 대하여 유의 입장에서는 윤회를 통하여 인정하고 무의 입장에서는 無我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하루에 20만 에이커(8만 정보, 1정보는 3,000평)의 열대우림이 파괴, 하루에 36천에이커의 땅이 사막화로 불모지가 된다. 하루에 방출되는 유독물질은 13백만톤으로, 오존층 파괴, 기후변화, 산성비로 수자원 오염을 일으키며, 그리고 하루에 130여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하루에 4만5천명이 기아로 죽어간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 현실적인 욕망의 극대화에서 비롯하는 것일 것이다.

    - 불교는 욕망의 극소화가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Robert Bellah: 종교 사회학자. 종교와 사회학의 이상적인 관계는 종교가 초월적인 이상세계를 지향하면서도 현실세계의 의미를 인정하여 종교적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키려 하는데 있다고 주장.

    - 서구의 가치는

    1) 인간중심주의적 윤리(Ethic of anthropocentrism)로서 인간의 내재적 가치는 절대적 가치이며 이외의 가치는 모두 도구적 가치라고 하였으나, 이어서 2) 동물중심주의적 윤리(Ethic of animocentrism)는 동물의 삶을 인정하여 인간의 윤리범위에 넣고 있다. 그리고 나서 3) 생물중심주의적 윤리(Ethic of biocentrism)로 발전하여 왔다. 여기까지가 서구의 환경에 대한 윤리의식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4) 우주-생태적 윤리(Ethic of Cosmo-Ecocentrism)를 언급하고 있다.

    梵網經에 “모든 흙과 물은 모두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모두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기에 늘 방생하고 歲歲生生 생명을 받아 머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인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고 모든 중생(무생물 포함)에 베풀어지는 것이다.

▶ 환경보살이 지향해야 할 6바라밀의 완성

    布施: 환경보살이 완성해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布施는 준다는 말이다.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홀로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에게만 머물고 있지 않고 때가 되면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바로 보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보시는 마치 흐르는 물이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계들이 살 수 있도록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보시를 통해서 모든 존재와의 연대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忍辱: 인간의 욕망을 소유의 방향으로만 투사시킬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있는 삶으로 지향하는 보살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데 이 욕망의 절제를 환경보살이 가야할 두 번째 양식인 忍辱이라 할 수 있다.

    持戒: 이렇게 자신과 전 존재가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고, 이 대전제 앞에서 자신을 극소화시키는 삶을 지킬 줄 아는 것을 持戒라고 할 수 있다.

    精進: 이러한 생태적으로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환경보살은 쉼 없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禪定: 이러한 노력으로 환경보살은 마침내 모든 존재와 원만한 관계성을 회복하여 평화로운 삶의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禪定이라 할 것이다.

    知慧: 이와 같은 5가지 환경보살의 완성되어져야 할 삶의 양식은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知慧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一切衆生 實有佛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