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그리스도교
1. 타종교를 바라보는 여러 입장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서양은 더 이상 자신을 세계문화의 중심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든 문화적 가능성과 실존처럼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음이며,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된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적 태도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태도로서 배타주의(exclusivism)는 오직 한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를 가르치고 그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배타주의는 ‘절대진리’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자기 종교의 절대성과 최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비타협적이고 다른 신앙을 무시하거나 이단시하는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이 입장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으며, 아직도 보수주의, 선교주의 교단에서는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 주장’은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타종교와의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다.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어느 한 종교만이 감당하여 해결하기 어려워졌다. 여러 종교들은 독선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관용적 태도로 서로 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서구의 종교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를 갖고 있고 다른 종교는 그 최종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적 또는 과정적인 진리를 가질 뿐이라는 포괄주의(inclusivism)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배타주의와 마찬가지로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어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라고 주장하려면 그 주장이 ‘보편적 기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그러한 범종교적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새로이 설정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결국 어떤 종교가 가장 우월하다는 주장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적 입장을 반대하고 나온 다원주의(pluralism)는 존 힉(John Hick)과 폴 니터(Paul Knitter)로 대표된다. 모든 세계종교(Worldreligion)의 공존을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서구인들이 세계의 여러 종교전통의 가치를 경험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요청에서 비롯되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다원주의는 불교나 힌두교의 포괄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존 힉의 견해는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와 진지한 대화를 원한다면 자기 중심적인 종교관에서 벗어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즉 과거의 종교관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태양이 돌고 있다고 믿었던 천동설(ptolemaic system)에 입각한 세계관에 비유할 수 있다면, 새롭게 요청되는 범인류적 종교관이란 그와는 반대로 태양을 중심으로 모든 혹성들이 함께 돌고 있다는 지동설적 세계관에로의 전회라는 것이다.
모든 세계종교는 각각 하나의 혹성으로서 새로운 절대자를 중심으로 함께 돌고 있다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존 힉은 이러한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바탕으로 하여 절대자 즉 ‘영원한 一者’(the Eternal One)가 다양한 종교문화 안에서 어떻게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지 각 종교는 서로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지구적 신학’(global theology)의 성립을 제의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입장은 모든 종교는 서로에게 동반자이지 결코 경쟁자이거나 적이 아니므로 서로 배워서 이해하자는 태도이다. 다원주의는 종교간의 갈등으로부터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이라는 이상주의적 자세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신학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이고, 오늘날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문화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신학의 분야에서도 가까운 이웃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이미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도 “20세기는 원자탄의 발명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진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질 것이다”라며 그리스도교 문명권과 불교문명권의 접근과 대화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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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空: Sunyata)과 케노시스(Kenosis: 空化)
서구의 철학이나 신학은 그리스 사유방식에 영향을 받아 실재(Reality)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원론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중세의 교부들에게 신학의 틀로 받아들여졌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오랫동안 反問이나 비판의 대상에서 초월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절대적인 이원론의 구조가 갖는 취약점을 보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에 대한 필요성이 신학 안에서 요구되고 있다.
동서양의 일련의 신학자들은 탈이원론적 신학의 가능성을 불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활로를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신학의 핵심적인 주제인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본질과 만물의 관계를 이원론적 구조에서 벗어나 상호연관적 연기성(緣起性)으로 이해하려는 점이다. 즉 모든 존재가 연기적 관계 속에 있다고 본 불교적 존재론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원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여는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서구의 신학은 불교와의 만남에서 새로운 도전 받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신학적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접근을 시도하는 신학자들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불교의 空개념과 그리스도교의 神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교토학파의 한 사람인 아베 마사오(阿部正雄)는 이에 대하여 대단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두 종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假定들을 철저하게 바꾸어 이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떠오를 수 있도록 근본적인 자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불교의 空 개념과 그리스도교의 神 개념을 혁명적으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상호대화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종교적 차원을 열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열린 차원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과학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분석사상 그리고 니체철학의 허무주의 등이 지닌 종교부정의 원리를 극복하게 하고, 두 종교는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새롭게 실현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베 마사오는 오늘날의 형태로 볼 때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아직도 진정한 우주적, 세계적인 종교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불교는 동양에 있고 그리스도교는 서양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두 종교가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형태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반드시 동양적 차원을 수용해야 하고 불교는 서양적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방법은 바로 대화이며, 이 대화는 두 종교전통의 세계화와 보편화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제 간단하게 空 개념을 살펴보고, 어떻게 空 개념이 그리스도교의 神의 ‘스스로 비움’(kenosis)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날 수 있나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에서의 만남이란 궁극적 실재에 대한 논의나 교리체계의 비교가 아니라 그 종교적 경험에 대한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는 외재적 실재인 神이나 우주의 발생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과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인식주체인 인간과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만나는 곳이 一切 곧 세계인데 붓다는 그 세계의 실상을 고(苦 duhkha)로 보았다.붓다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 즉 인격의 완성이란 바로 고(苦)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즉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한마디로 고(苦 duhkha)의 원인을 바로 보고, 그 고(苦 duhkha)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붓다는 일체의 속성을 세가지로 말하였다. 이는 고(苦)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은 영원하지 않고(無常), 따라서 일체는 괴로움이며(苦),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기에 참다운 자아인 실체가 없다(無我)라고 하였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anatman)의 원리와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존적인 것이 없다는 연기(pratityasamutpada)의 원리는 불교의 근본적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연기란 사물간의 의존적인 발생과 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일체가 무상하고 연기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우주적 힘인 브라만이나 하나 뿐인 유알신(唯一神)에 대한 관념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부적당한 것이다. 모든 사물은 관계적으로 발생하고 서로 의존적으로 共生하고 있으므로 영원하고 실체적인 자아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영원과 불멸이라는 환상에 빠져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본다.
이 진리의 깨달음이 바로 ‘지혜’(prajna)이며, 이 지혜를 현실생활에서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자비’(metrakaruna)인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현실적인 삶의 기초가 되며 또한 모든 형태의 속박과 집착으로 벗어나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이루게 하는데, 그것을 열반(nirvana)이라고 한다. 이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이 붓다의 정신적인 깨달음과 도덕적 행위를 종합한 팔정도이다.
원시불교 이래로 전승되어온 근본적 관념들은 용수(龍樹, Nagarjuna)에 와서 空(sunyata)관념으로 확립되어진다. 자아의 부정은 자성(svabhava)의 부정으로 논리적 전개를 하게되고, 다시 자성의 부정은 인간의 자아와 관계된 독립적인 실재의 부정 뿐만 아니라, 존재나 실존의 내재적인 실체인 그 어떤 것도 부정되는 것이다. 이런 空의 논리는 모든 만물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부정에 이른다. 여기에서 空性(sunyata)은 명사로서 또 다른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 존재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집착을 벗어난 관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이 궁극적 실재 즉 무아의 반대 개념인 영원한 眞我이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상의상관적 관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관계성을 통하여 실재를 바라볼 수 있으며, 다시 이 관계성은 실재를 해방시키게 한다.
여기에서 실재는 외형적인 현상(phenomena)일 뿐 어떤 ‘절대적인 실재‘(Absolute Reality)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총체적인 구조’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총체적인 구조’는 종교적 우주론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총체적인 구조 혹은 총체적인 사고는 이원론적 구조나 이원론적 사고를 초월하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교에서 神은 초월적 존재로서 유일하고 절대적이기에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神의 자기 비움(kenosis)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의 ‘자기비움’은 바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 되어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성경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보서 2,6-8)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일한 神的 본능을 지녔으나 神的인 지위를 포기하고 종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그렇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자신을 비웠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으로 자신을 비웠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이 완성은 인간 예수의 자기 비움과 하느님의 자기비움이 일치하는 것에서 찾는다.
예수의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서 예수의 완전 無化가 이루어지고 그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되고 또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의 역동적인 기능인 자기비움(kenosis)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삼위를 가진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삼위가 서로 전적으로 개방된 순수한 관계성 속에 있음을 상정해야 하고, 이런 관계성은 타자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인 동시에 다시 타자를 지향하는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연기법적 사고에 힘을 입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의 자기 비움으로 예수로의 육화가 가능했고, 예수는 자기비움을 통하여 구원을 실현시켰으며 성령은 성화적으로 자기 비움을 나타내는데, 이것의 내적인 작용을 상호 역동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상호의존, 상호개방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아무런 장애 없이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삼위일체가 폐쇄적이고 고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다른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비우는 창조적인 상태로 설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불교의 화엄철학에서 보이는 법계의 상즉상입의 상태에 비교할 수 있다.
법계에서는 모든 실체가 상호관계 속에서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홀로 자신의 본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처럼 하느님도 자기비움을 통하여 서로 상즉상입하는 관계를 갖게 되고, 삼위가 서로 안에서 구별이 없어지게 되므로, 자연히 이원론이 극복되어진다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불교의 空에 비교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창조적인 대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존 콥(John Cobb)과 같은 신학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대화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호 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측에서 불교를 향해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찾으려 했고, 그것으로써 대화의 실마리를 삼았다면 이제는 반대로 불교측에서도 그리스도교 안에 ‘익명의 불교도’를 찾아 나서는 자기개혁, 자기확산의 용기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불교적 포괄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자기모습의 변혁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空은 신앙의 대상인 神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는 아베 마사오의 진술은 앞으로 불교의 空에 대한 해석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많은 통로를 열어줄 것이며, 특히 이원론적신학체계가 불교와의 적극적인 접근으로 극복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혁되어 갈 것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