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에 대해서 배울 때에는 다른 여러 바라밀의 전부를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바라밀을
배우고 싶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된다.
-소품반야바라밀경-
반야바라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허공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사라지지 않는다.
-소품반야바라밀경-
옛날 인도에 선주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나라를 훌륭히 다스려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웃의 나쁜 왕이 선주국의 부유함을 탐내어 쳐들어 왔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쟁에 지고 나라를 빼앗긴 선주왕은 부인과 아들 선생을 데리고 피난 길에 올랐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식량이 떨어지고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왕은’셋 다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부인을 죽여 고기를 구하고자 했다. 이를 본 선생은 “저를 죽여 식량을 삼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어머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칼을 거두었으나 선생동자는 ‘저를 죽여 버리면 고기가 썩어 버리므로 조금씩 잘라 드십시오’하며 자기 칼로 자신의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께 바쳤다.
이윽고 뼈만 남을 즈음에 선생은 “제발 무사히 돌아 가십시오.그리고 저는 자신을 희생한 공덕으로 미래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도록 빌어 주십시오”하며 부모와 헤어 졌다.
이때 제석천이 선생을 시험하기 위해 늑대로 변신하여 그 앞에 나타나자 선생은 ‘이제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몸을 늑대에게 베풀자’하며 기꺼이 몸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석천은 변신을 풀고 “부모를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털끝만큼도 원망치 않습니다.그러나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 증거로서 저를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십시오”하니 선생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보살본생만론 中]
옛날 어떤 들판에 수많은 토끼가 살고 있었다. 토끼들은 새끼를 많이 낳아 사람들의 양식까지 위협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큰 골치거리로 생각했다.
보리살타라는 토끼는 ‘곧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러 몰려올테지. 그전에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할텐데, 깨달음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언젠가 부처님처럼 될 수 있겠지’하며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주변의 토끼들에게 일러 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금욕 생활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토끼들은 보리살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조소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바라문이 참선을 하려고 숲속으로 들어왔다가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보리살타는 이것을 보고 ‘이 사람은 지혜로운 바라문이니 언젠가 많은 사람들의 빛이 되어 줄거야. 내가 이사람의 음식이 되어 주린 배를 채워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불속으로 뛰어 스스로 음식이 되어 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토끼 사냥을 시작해 수 많은 토끼를 죽여 버렸다.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최고 실천 덕목으로서 강조되었다. 육바라밀은 나와 남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완성된 세계로 나아가려는 실천 덕목이다.
소승불교에 있어서 수행자에게 부여된 실천 덕목들은 개인 차원의 것들로 이해되고 세속을 초월한 고고한 수행만을 요구했었다. 이러한 결과로 불교는 점차 중생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채 관념적 논리 체계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보수적 교리해석과 개인적 수행보다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신앙회복운동이 일어나 이를 대승이라 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자타불이(自他不異)의 입장에서 중생에 대한 헌신을 통해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했다. 깨달음의 추구와 중생구제는 동시적인 사명이요,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침을 부정했다. 그래서 육바라밀의 첫째 항목에 보시를 넣고 동체대비의 정신을 강조했다.
완성에 이르는 길은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이 보살의 길이요, 모든 부처님들이 밟았던 길이다.
김상범기자
2009-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