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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시의 금강경(4)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5-04-14 (화) 12:28 조회 : 954

오쇼 라즈니시의 금강경

제1장 법회인유분 2

... 불교경전이 처음으로 서양에 번역되었을 때, 서양의 번역자들은 다소 당황했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들에 대한 묘사가 끝없이 반복되는가? 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을 단순히 반복이라고,쓸데없는 중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도무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난다가 말하려는 것은,붓다가 큰 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 처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의를 쏟는다는 것이다. 붓다에게는 사소한 일도 없고 큰 일도 없다. 모든 일이 한 가지이다.

... 그는 밥그릇을 들 때에도 신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한다. 가사를 걸치거나 옷을 입을 때에도 그는 매우 주의깊다. 그는 전적으로 깨어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달음박질친다. 목욕을 할 때에도 그대는 목욕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있지도 않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대는 음식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없다. 그대는 다만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모든 일을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 이렇게 자잘한 일들도 기록할 가치가 있다. 그 모든 일이 깨달음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붓다는 매 순간 각성된 의식으로 산다. 무슨 일을 하든 관계없다. 무슨 일을 하든 그는 매 순간 그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몸짓을 할 때,그는 그 몸짓 자체가 된다. 미소 지을 때,그는 전체적으로 미소짓는다. 말할 때,그는 그 말 자체가 된다. 그리고 침묵할 때에는 완벽하게 침묵한다.

... 붓다와 같은 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그의 걸음걸이, 앉음새, 몸짓, 그리고 어떻게 그대를 바라보는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은총이다. 그때에는 매 순간이 빛나는 각성의 순간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토록 자잘한 일들까지 전하는 것이다. 붓다가 들어와 옷을 정돈하고,발을 씻고,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 몸을 곧게 펴고, 앞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았을 때, 거기에는 거대한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이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불교의 특수한 수행법으로 '아나판사티요가(anapansatiyoga)'라고 불린다.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이것이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예를 들어, 옷을 입을 때에도 그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다. 걸을 때,그는 걸음에 주의를 쏟는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는 언제나 주의깊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주의깊다.

한번은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아난다는 십년동안 붓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붓다가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자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밤중에 일어나서 스승님을 주무시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줄은 압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남몰래 스승님의 주무시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밤새도록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신겁니까,아니면 내내 깨어계신 것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잠은 육체에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서서히 잠이 밀려온다. 어느 덧 잠이 내 육체에 도달하여 자리를 잡는다. 이제 몸이 이완되고 팔다리가 느슨해진다. 그러나 나는 밝게 깨어있다."
명상은 하루 24시간 내내 일어나는 일이다. 명상은 하루에 한번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다. 명상은 그대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 명상은 그대의 분위기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무엇을 하건 명상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어야 한다.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그 때에 많은 비구(比丘)들이 스승이 계신 곳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스승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고는
스승의 주변을 오른 쪽으로 세번 돈 다음에
한 쪽에 가서 앉았다.

... 붓다와 같은 이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대답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붓다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대가 무례한 태도로 물어도 붓다는 대답을 줄 것이다.그러나 그대가 그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정중한 태도를 지녀야만 붓다가 대답을 줄 것이라는 문제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붓다는 대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매우 정중하지 않다면,매우 겸손하고 여성처럼 수용적이지 않다면,그대는 그 대답을 놓칠 것이다. 어떤 자세로 묻느냐에 따라 그대는 대답을 얻을 수도 있고,못 얻을 수도 있다.

... 질문할 때 그대는 어떤 자세로,어떤 마음으로 묻는가.....그대는 수용적인가? 단순히 호기심때문에 묻는 것은 아닌가? 그 질문이 마음속에 축적된 지식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그대의 질문은 순수한가? 또는 이 사람이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하기 위해 묻고 있지는 않은가? 그대는 이미 마음 속에 어떤 지식을 갖고 묻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묻고 있는가? 그대는 겸손하게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일 대답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값진 선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그대는 문을 활짝 열고 그것을 환영할 것인가? 그것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이 그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씨앗이 되도록 허용할 것인가?

... 세 바퀴 도는 것은 세 개의 육체에 대한 상징이다.
첫번째 도는 것은 물질적 육체,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육체를 위함이다. 붓다의 물질적 육체 또한 아름답다. 그것은 신이 거주하는 사원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도는 것은 첫번째 육체,물질적 육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그리고
두번째 도는 것은 지복의 육체, 그 두번째 육체를 위함이다.
세번째 도는 것은 붓다의 육체, 진리의 육체를 위함이다.

... 이렇게 세 바퀴를 도는 것은 또 다른 것을 상징한다. 불교에는 삼귀의(三歸依)라는 것이 있다.

나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나는 붓다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 붓다에게 어떤 것을 물으러 오는 사람은 이렇게 귀의해야 한다. 그는 이런 마음상태를 가져야 한다.
"나는 붓다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나는 붓다와 같은 파장으로 물결칠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당신은 나의 귀의처입니다. 나는 제자로서 여기에 왔으며,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나는 당신은 알고 있으며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내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상가(sangha)에,붓다의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왜냐하면 한 명의 붓다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명의 붓다는 모든 붓다에게 들어가는 문이다. 그대는 붓다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도 있고,크리슈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은 여러 다른 전통에 의해 주어진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모두가 붓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귀의는 바로 그대 앞에 있는 이 붓다에 대한 것이다. 두번째 귀의는 모든 붓다,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붓다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귀의는 담마(Dhamma),인간을 붓다로 만드는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것이다. 각성의 예술이 담마,즉 종교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