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시의 금강경
제4장 묘행무주분 계속
자,이제 경전으로 들어 가자.
<원문>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 붓다가 "그러므로,수부티여,주의깊게 잘 들어라."하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부티는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아무 미묘하고 알아차리기 힘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얻은 바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나는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구체적인 생각으로 굳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막연한 느낌,깊은 곳에 일어나는 작은 파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담마(Dhamma)를 선물로 준다면....."
그리고 붓다는 법보시(法布施)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그대의 깨달음을 주는 것,그것을 나누어 주는 게 가장 큰 선물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나누어 준다.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일이다. 그가 나누어주지 않는다해도 그가 죽으면 어차피 재물은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다른 것을 나누어 준다. 그러나 깨달음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곧 영원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신(神)을 나누어 주는 것이고,궁극의 세계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것을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 지금 붓다는 수부티에게 말한다. 네가 얻은 게 무엇이든지 그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한다. 위대한 결정, 치토파드(Chittopad)를 내려라. 모든 인간을 구제하기 전에는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겠다는 위대한 결정을 내려라. 그대가 사라지기 시작하기 전에,그대의 존재 안에 굳은 결의를 일으켜라. 그대의 배가 건너편 기슭로 떠나기 전에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는 위대한 열망을 일으켜라. 그 열망이 그대를 이쪽 기슭에 묶어두는 닻 역할을 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위대한 결정,치토파드를 일으켜라. 그대의 온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라. "건너편 기슭에 대한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나는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거기 엄청난 유혹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수많은 생동안 염원해온 건너편 기슭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남아있고 싶지 않은 거대한 충동이 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남는단 말인가?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았다. 이제 그대는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붓다는 말한다.
"그 입장권을 찢어서 던져 버려라. 모든 인간을 구제할 때까지 절대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겠다는 위대한 결정을 내려라."
이 말을 듣고 수부티의 가슴 속에,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알아채기 힘든 미묘한 욕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일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겠는가. 얼마나 많은 공적을 남길 것인가."
그 욕망은 작은 파문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부티조차 그것을 읽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욕망은 섬광처럼 아주 잠깐 동안,찰라지간에 스쳐 지나가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욕망이 붓다의 거울에 비추어졌다.
... 스승은 거울이다. 그대 안에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은 스승의 거울에 비쳐진다. 때로 스승은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질문은 그대의 내적 존재와 아무 관계도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는 그대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술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 나는 얼마나 훌륭한 구도자인가? 나는 이렇게 수준높은 질문을 한다."고 내 보이려는 저의(底意)가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아무 알맹이도 없이 다만 지적인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때에 스승은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스승이 그대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묻지 않았을뿐만 아니라,그대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대답은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와 필요에 관련된 대답일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가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 집착은 동기(motive)를 의미한다. 집착한다는 것은 "나는 그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니다. 그리고 니르바나는 선물이 될 수 있을 뿐,거래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장사가 아니다. 그대는 다만 순수한 기쁨으로 나누어 주어야한다. 그로부터 무엇을 얻겠다는 동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동기를 갖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도 도울 수 없다. 그대자신이 아직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아직 자유롭게 해방되지 못했으며,저쪽 기슭로 건너갈 수 있는 입장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끌어들일 뿐이다. 사람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다.
... 진정한 선물은 흘러넘치는 것이다. 그대는 깨달음으로 너무 충만한 나머지 계속하여 흘러넘친다. 그것은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갈 때 그대는 그에게 감사한다. 그대의 짐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비구름이 몰려와 대지에 비를 뿌릴 때,비구름은 대지에 감사한다. 대지가 비를 받아들임으로써 구름은 짐을 덜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시 또한 이와 같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난다. 그대가 원하는만큼 나누어 주어도 깨달음의 샘물은 계속 솟아나고,다시 또 다시 흘러넘친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그대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터에 도달했다. 이제 그대는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동기가 있어서도 안된다. 무엇인가 댓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원문>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 그는 "이것은 선물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너는 받는 사람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생각과 관념을 버려야 한다.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그 모두가 하나이다. 그대가 돕고 있는 자 또한 그대이다. 그대가 주고 있는 자는 다른 형태의 그대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왼 손으로 오른 손에 건네주는 것과 같다. 그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물을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가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 이제 그대는 계속 이런 문제에 부닥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공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대의 공덕은 실로 크다. 그러나 그것을 공덕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공덕이 사라질 것이다. 공덕을 바라면 공덕을 잃을 것이요,공덕을 원치 않으면 한없는 공덕이 쌓일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아라,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낮은 차원에서는 예수의 말이 옳다. 이 말은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보디사트바의 경지에 오른 수부티를 상대로 말하고 있다. 붓다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하라 그러면 얻지 못할 것이요,찾아라 그러면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모든 문이 꽁꽁 닫혀서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들의 말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그 말을 듣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는 평범한 무리들에게 말하지만 붓다는 아주 비범한 한 개인에게 말한다.